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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원래 계획은 ‘양평 바탕골 아트센터’에 가서 이전에 만든 도자기를 찾아오려고 했다. (5월 24일까지 찾지 않으면 폐기처분 당할 위험한 상황 ^^)

 

 하지만 차가 너무 막히고  출발이 늦어져서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화려한 외출을 꿈꾸어 온 우리는 마음을 달래보고자 가까운 창경궁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입장료는 1,000원. 표를 사려는 데, 옆에 어떤 아주머니가 부르더니 초대권을 두장 준다.

 

고궁 가족 음악회에 초대하는 초대권.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에게 베푼 아주머니의 친절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듯 했다.



 

도심속의 고궁. 차를 타고 지나갈 때는 얼마 안되는 넓이로 보였고,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안에서 걸으며 느낀 것은 바깥에서 생각했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마음이 느긋해지고 상쾌해 지는 느낌? 덕이는 폴짝 폴짝 뛰고 싶다고 표현했다.


제목을 보고 이글에 관심을 가진 블로거라면 이 다섯 고궁의 차이를 알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이전부터 한번 정리하고 싶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참고하여 다섯가지 궁을 간단히 정리해 본다.


서울에는 5개의 고궁이 있다.


1) 경복궁(景福宮)

광화문을 생각하면 쉬워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 = 법궁

이성계가 수도를 서울로 천도한 후 1395년에 지음. 대화제로 한번 소실되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됨. 250년간 방치되다가 1869년 흥선대원군이 재건함.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경복궁의 전각들을 부수기 시작하고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안에 세우고 광화문을 옮기는 침략정책을 저질렀다. 1995년 구 조선총독부 청사가 철거 되면서 경복궁 이 이전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2) 창경궁(昌慶宮)

서울대학교 병원 맞은 편에 있는 궁궐

이궁(=행궁=별궁)으로 세워짐.성종은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와 생모가 되는 소혜왕후(昭惠王后)와 양모(養母)인 예종의 비 안순왕후(安順王后)를 위하여 창경궁을 창건하였다. 일제 때 창경원으로 격하되어 동,식물원이 되었다가 복원되었다. 1983년 동물원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3) 창덕궁(昌德宮)

인사동 지나서 현대자동차 본관건물 옆에 있는 궁궐

원래 이궁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부터 경복궁 재건까지 정궁(법궁)역할을 하였다. 창덕궁 후원(後園)을 「비원(秘苑)」이라 한다. 비원의 면적은 약 9만여평에 이른다. (창덕궁에 비원이 포함되는 것이다. 창덕궁을 ‘비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제가 왜곡 축소시켜 부른 것이라고 한다.) 비원은 제왕이 수학(修學)하고 수신(修身)하면서 치도(治道)를 닦고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어진 정치를 하기 위한 휴식처이기도 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세계적 명원(名苑)으로 창덕궁과 비원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4) 덕수궁(德壽宮)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답니다.

세조 장자인 도원군(桃源君)의 큰아들 월산대군(月山大君)의 개인집(私家)이었다. 선조가 임진왜란에서 피란 후 돌아와 보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버려서 왕이 거처할 왕궁이 없어서 왕족(王族)의 집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완전했던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행궁(行宮)으로 삼아 왕이 잠시 거처하게 되었다.

 


5) 운현궁(雲峴宮)

운현궁은 조선조 26대의 임금인 고종(高宗)의 잠저(潛邸)로서 이곳에서 12세 즉위때까지 성장하였다. 사적 256호로 지정된 것은 흥선(興宣)대원군(大院君)의 사저(私邸)인 한옥집들과 1910년대로 새로 지어 후일 덕성여대 본관으로 사용하던 양관(洋館) 모두를 합친 것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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